저의 글자는 야생마와 같이 종이 위 여기저기를 뛰어다닙니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핸드폰 메모장에 글을 남기는 것이 익숙한 요즘입니다.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쓴다고 하지만 노트북이나 핸드폰으로 글을 남길 땐 입력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네요🤔
기억을 더듬어 저의 글자가 야생마 된 순간을 떠올려보니 시간이 촉박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거나, 이면지 혹은 반듯하지 않은 종이에 글자를 쓸 때였던 것 같습니다. 가끔은 놓치고 싶지 않은 생각을 급하게 남길 때도 있었네요. 하지만 중요한 내용도 날뛰는 글자로 써 놓는 걸 보면 나의 '필체 = 야생마체'인 걸까 싶습니다. 다행히 대부분의 중요한 글들은 컴퓨터에 입력되어 프린트로 인쇄되니 손 글씨에 정성을 담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불현듯 글자를 정성스럽게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글씨를 또박또박 쓰고 싶다"는 저의 말에 걸음(퐁의 크루)이 필사를 해보라고 했죠. 마침 안희연 시인의 시집 <당근밭 걷기>를 구입했던 터라 시집과 노트를 펼쳤습니다. 몇 개의 시구를 필사하자 예상하지 못한 알아차림과 기억들이 떠오르며 기분 좋음을 느꼈습니다. 기분 좋은 알아차림과 기억이라기보다 그저 그 순간이 기분 좋았습니다.
저의 알아차림과 떠오른 기억은 이런 것들입니다.
- 어릴 때나 지금이나 글자를 쓸 때 손과 어깨에 많은 힘이 들어간다.
- 정성껏 쓰고 싶은 의지와 상관없는 손에 밴 날려쓰기
- 나의 ‘ㄹ’은 유난히 성급하다(세 번의 호흡으로 ㄹ을 쓰는 것은 꽤나 힘들었습니다).
-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삐딱하게 놓인 노트의 모양
- 친한 친구들과 쪽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글자체를 닮아가던 기억
저의 필사는 정성스러운 글자 쓰기가 목적이었지만 필사를 하는 다른 이들처럼 평소보다 깊은 독서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정성스럽게 글자를 쓰려다 보니 속도가 느려졌고 필사하던 시구는 느린 호흡으로 저에게 다가와 길게 머물다 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단어 하나를 섬세히 느끼고 문장의 장면과 심상을 상상할 수 있는 여유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시를 좋아하지 않았던 저로써는 시를 필사하는 것은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죠.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은 필사를 해보셨나요?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 혹은 그간 책장에 꽂혀만 있던 책을 꺼내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문장과 이야기를 즐겨보세요. 필사를 통해 글과 그 순간의 알아차림을 음미하세요. 분명 저처럼 기대하지 않은 알아차림과 기억들이 떠오를 수 있을 거예요. |